의례를 넘어서
지나치게 종교적 의례에만 의존하다 보면, 실제 행동이나 지식과는 동떨어진 엄숙한 기운만 팽배할지도 모른다. 의례는 결코 경건한 마음과 이웃에 대한 사랑, 신과 일대일로 하나 되는 경험들을 대체 할 수 없다. 거의 모든 종교에서는 종교 내부에서부터 의식주의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있다.
어떤 종교의 창시자가 겉으로는 다른 종교의 의식주의를 강하게 비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말씀은 본질적으로 자기 종교 신도들에게 그것을 타산지석으로 삼으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문선명 선생도 지나친 의식주의에 대해 동일한 입장을 견지하시며, 두 가지 내용을 덧붙여 말씀하신다.
첫째, 의식이 다른 종단과 신앙 사이에 벽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종교가 하나 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는 일이다. 모두가 하나 되어야 할 이 시대에 의례적 장벽은 초월되어야 한다.
둘째, 하나님과 예수님을 향한 경건한 신앙적 의식 자체가 언제나 그분의 심정과 뜻을 헤아릴 수 있는 내적 지혜까지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죽음에 사용된 저주받은 형틀이자, 이 땅에 지상천국을 이루려던 뜻을 완성하지 못하고 떠난 예수님의 수천 년의 슬픔과 좌절의 근원인 십자가에 대해 많은 기독교인은 그것을 구원의 상징으로서 이해하고 받들고 있다.
고대 종교적 의식의 중심에는 동물 헌제가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은 몇몇 사례를 제외하고 거의 없어졌다. 많은 종교가 여전히 헌신적 신앙 활동을 중시하고 연구하며 경전에 나타난 고대 제사의식의 핵심을 소중히 여기고 있지만, 더 이상 같은 형식의 제사의식을 행하지는 않는다.
탈무드에서는 이웃에 대해 자비를 베푸는 것이 속죄양을 통해 제물을 바치는 것과 같은 가치를 가진다고 가르치고 있다. 부처님은 동물 헌제가 살아 있는 생명을 죽임으로 인해 악한 업보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비난한다. 그 대신에 부모를 공경하고 가족을 돌보고 탁발승에게 보시를 베풀면서 충족될 수 있는 영적 봉헌의 의미를 가르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