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결코 포기하지 마라, 끝까지 견뎌라
종교 경전
성서는 임무를 시작하는 자에게가 아니라 임무를 완수한 자에게 공적을 치하한다.
탈무드, 소타 13b (유대교)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마가복음 13.13 (기독교)
그런데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다보다가 그만 소금기둥이 되어버렸다.
창세기 19.26 (기독교)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맙시다. 꾸준히 하노라면 거둘 때가 올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9 (기독교)
그대는 큰 강을 건넜다. 어찌하여 그대는 강가에서 꾸물거리고 있는가? 가우타마여, 서둘러서 피안에 닿아야 한다. 항상 주의하라!
웃타라디야야나 수트라 10.34 (자이나교)
인의의 도를 구현하고자 하는 사람을 우물 파는 사람에게 비유할 수가 있다. 우물을 구인까지 팠어도 물이 안 나온다고 도중에 그만두면, 이는 마치 우물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맹자 VII.
A.29 (유교)
가령 어떤 이가 나무 속 깊은 곳에 자라나는 고갱이를 구하러 숲으로 갔는데, 다만 죽은 나뭇가지와 가랑잎을 한 짐 지고 나와서는 그가 구하는 바를 얻었다고 즐거워한다면, 그가 어리석지 않는가?
모든 슬픔에서 벗어날 길을 구하여 나선 이가 다만 조금밖에 나아갈 수 없는 길을 따라가 곧 그 끝에 닿고는 이로써 뽐내고 자부심을 지닌다면, 그는 고갱이를 구하러 숲에 들어간 이가 죽은 나뭇가지와 가랑잎 한 짐에 만족하여 돌아오는 바와 다르지 않다.
또 어떤 이는 나무 속의 고갱이를 구하러 숲으로 들어가, 다만 나뭇가지 한 바리를 싣고 돌아와 만족한다. 스스로 법을 구하러 떠난 이가 자신의 조그마한 노력으로 얻은 진전에 만족하여 곧장 노력을 늦추고 뽐내며 자만하는 이는 바로 이와 같다.
또 어떤 이는 나무 속의 고갱이를 구하러 숲으로 들어가 나무껍질을 한 바리 싣고 나와 이로써 만족한다. 자신의 마음이 차츰 맑아지고 생각이 고요해지기 시작하는 이가 곧장 자신의 노력을 늦추고 뽐내며 자만하는 이는 바로 이와 같다.
또 어떤 이는 나무 속의 고갱이를 구하러 숲으로 들어가 그 대신에 장작을 한 바리 싣고 나와 이로써 만족한다. 정진하여 어느 정도의 통찰력을 얻은 이가 다만 이로써 만족하여 뽐내고 자만하는 이는 바로 그와 같다. 이와 같이 흡족하지 못한 노력을 하고도 쉽게 만족하여 자신의 노력을 늦추고 뽐내며 으스대는 이들은 쉽게 나태와 방종에 빠지리니, 필경 이들은 다시 고통과 슬픔을 만나게 되고 만다.
맛지마 니카야 I.192-193 (불교)
증자(曾子)가 말하였다. “선비는 도량이 넓고 뜻이 굳세지 않으면 안 된다. 짐이 무겁고 길이 멀기 때문이다. 어짊(仁)으로써 자기의 책임을 삼으니 또한 무겁지 아니한가? 죽은 뒤에라야 끝나니 또한 멀지 아니한가?”
논어 8.7 (유교)
말씀 선집
성경(마 24:1-14) 말씀 가운데 끝 날의 징조에 관한 말씀이 있었습니다. 끝 날에는 신앙을 중심삼고 살아나가기가 어렵다는 사실이 여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혼란기를 극복하여 승리자가 되려면 끝까지 참고 견디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4-237~238, 1958.05.18)
어디까지 참고 견뎌야 되느냐 하면 끝까지 참고 견뎌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6천년 동안 참고 견뎌 나오신 분입니다.… 그 분이 누구입니까?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우리는 그 아버지의 천품과 피와 살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그 아버지와 같이 되어야 합니다.
(44-28, 1971.05.04)
신앙생활은 하루아침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일생 동안…. 신앙생활 가운데 있어서, 내가 죽더라도 영원을 중심삼고 신앙해 나가는 길에 있어서, 내가 그 절개를 지켜야 할 것이 문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중심 되는 골자가 있어야 됩니다. 영원히 믿고 가야 할 길이기 때문에 영원히 그것을 부정할 수 없는 나라는 것을 발견해야 됩니다.
(59-234~235, 1972.07.23)
여러분에게 참음이 있다 하지만 그 참음이 역사적인 참음의 종착점과는 먼 거리에 있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와 인연된 사람들이 지쳐서 못 가겠다고 합니다. 통일교회는 좋지만 어려워서 못 가겠다고 하는 말을 듣게 되는데, 그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땅을 두고 보면 행복한 자일지 모르나 하늘을 두고 보면 불쌍한 자일 것입니다. 과연 가기가 어렵습니다.
가는 길은 눈물의 길입니다. 보고 울고, 느끼고 울고, 싸우면서 우는 눈물의 길입니다. 눈물이 그칠 시간이 이 때인 줄 알았더니 아닙니다. 눈물이 더 연속되어야 하는, 즉, 더 참음의 눈물을 고대하시는 하늘의 심정이 있는 것을 알고 하늘이 처량한 모습들인 우리를 기다리는 것을 알게 될 때, 내가 참았다는 그 사실도 하늘 앞에 면목이 없습니다.
선생님은 해방 이후 오늘까지 나왔으나 아직까지 내 참음의 한계를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또 끝나기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끝나기를 바라는 그 시간서부터 자기를 살필 것이며, 그 시간서부터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신앙생활에서 느껴봐야 됩니다.
(6-89, 1959.03.29)
하나님은 한번 딱 정하면 억 천만 년이 가더라도 변하지 않고 행하지 않을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의 마음을 보게 되면 하루에도 몇 번 변합니다. 아침에는 ‘이렇게 해야 되겠다’고 결심을 했다가는 저녁에 가서는 ‘아이쿠…’ 한다는 것입니다. 수련을 받을 때, 말씀을 듣게 될 때 ‘그렇게 해야 되겠다’ 하고 결심을 하지만 돌아서게 되면, 며칠도 안 가서 사회에 부딪치게 되면서 다 흘려버립니다.
하나님은 한번 결심하면 그것을 몇 천 년이고 문제 삼아 영원히 간직할 수 있는 분입니다. 가다가 이러고저러고 하는 게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내가 뜻을 위해 간다’ 하지만 금년 말, 혹은 내후년, 혹은 십 년, 이십 년, 일생을 그렇게 갈 겁니까? 이것이 내려가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는 데는 ‘내가 좋아야 가지 나쁘면 못 가겠다’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참이라는 것은 내가 죽든지 살든지 참입니다. 그것은 죽음 위에 있을 수 있는 것이요 변하지 않는 불변의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나, 죽음 위에 있는 그것을 소유할 수 있는 내가 되기 위해서는 죽음을 극복해야 되고, 변치 않는 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은 확실히 틀립니다.
이것들이 부딪치게 되면 변하는 것은 깨져 나가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완연히 남아지는 것입니다. 죽음과 삶이 부딪치는 것입니다. 그때 죽음을 극복하고 삶으로 남아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과정을 넘어서야만 하나님과 관계된다는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두고 볼 때 참이 우리 앞에 나타날 수 있는 때는 언제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 나타나는 때입니다. 다음에는 죽음과 삶이 여기에 나타나는 때입니다. 그래서 둘이 대결하는 때입니다.
(66-43~44, 1973.0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