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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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죽음 : 새로운 생명으로 전환

종교 경전

그렇게 되면 티끌로 된 몸은 땅에서 왔으니 땅으로 돌아가고, 숨은 하나님께 받은 것이니 하나님께로 돌아가리라. 전도서 12.7 (기독교)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시고 또 생명을 앗아가니 결국 하나님께로 돌아가리라.
꾸란 50.43 (이슬람)

이제 나의 숨과 영혼은 불멸자에게 가며 이 육신은 재가 되어 끝난다. 옴, 오, 의근(意根)이여, 기억하라. 그 행위들을 기억하라. 그 일들을 기억하라.
이샤 우파니샤드 17 (힌두교)

인간의 본성이 지향하는 것은 영적 삶이다. 이 영적 삶은 육신이라는 고치를 만들어 그 속에 자신의 영혼을 담기 위하여 마음이라는 실을 짜는 것과 같다. 그때에 비로소 영은 육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분명히 알라. 고치가 누에일 수는 없다는 것을. 마찬가지로 육신이 바로 사람일 수는 없다.
단지 인간을 담고 있는 고치일 뿐이다. 누에가 고치를 깨고 자유롭게 날게 되듯이 사람도 그의 육신이라는 고치를 벗어버리고 때가 되면 영계로 상승하게 되는 것이다. 결코 육신의 죽음이 인간의 죽음이라 생각하지 말라. 왜냐하면 인간이란 생명을 뜻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죽음이란 없는 것이다.
감로의 법우 (생장의 집)

그[자아]를 죽이는 자로 생각하거나, 그를 죽임 당하는 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둘 다 무지한 자들이니, 실로 죽이는 자도 죽임을 당하는 자도 없다. 그는 결코 태어남이 없으며 죽음도 없다. 그는 변하지 않으며 변할 수도 없다. 그는 불생불사로 영원히 있는 자니라. 육신이 죽임을 당할 때에도 그는 죽지 않는다. 그는 불멸하며 영원하나니, 오, 파르타의 아들이여! 어떻게 누구를 죽이거나 죽게 하겠는가?
사람이 낡은 옷을 벗어버리고 다른 새 옷을 갈아입는 것처럼, 그와 같이 몸의 주인도 낡은 육신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육신들로 옮겨 가느니라.
그는 칼로도 베지 못하며, 불로도 태우지 못하며, 물로도 또한 적실 수 없으며, 바람으로 말려 버릴 수도 없나니, 베어질 수도 없고 태워질 수도 없으며, 적셔질 수도 말려질 수도 없는 이가 바로 그이니, 그는 영원 무소부재하며 확고하여 변함이 없느니라. 그는 나타나 보이지도 않으며, 모든 사량 분별을 넘어 있으며, 변화를 초월하여 있느니라. 이와 같이 그를 안다면, 아르주나여, 그대는 슬퍼하지 말라.
바가바드기타 2.19-25 (힌두교)

그래도 너희는 현세의 삶을 더 선호하는가. 내세가 더 좋으며 영원하리라. 이것은 옛 성서에도 계시되어 있으며 아브라함과 모세의 성서에도 그러하니라.
꾸란 87.16-19 (이슬람)

오냐메는 죽지 않는다. 따라서 나도 죽지 않을 것이다. 아칸족의 격언 (아프리카 전통종교)
조상들을 만나라, 야마를 만나라, 그리고 최고의 천계에서 모든 바람을 이루어라. 불순함을 떨쳐버리고, 그대의 거처를 새롭게 찾아서 빛나는 몸을 받아라.
리그 베다 10.14.8 (힌두교)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고 있으나 속사람은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일시적인 가벼운 환난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원하고 큰 영광을 우리에게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순간적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집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압니다. 그 집은 우리의 손으로 지은 집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입니다. 지금 육신의 장막을 쓰고 사는 우리는 이 하늘에서 오는 우리가 살 집을 덧입기를 사모하면서 이 장막 집에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입을 때에 우리는 벌거벗은 사람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장막 집에서 사는 동안 우리는 무거운 짐에 눌려 신음합니다. 그것은 이 장막을 벗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위에 덧입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이루어지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는 그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마음이 든든합니다. 우리가 육을 따라 살고 있는 동안 주에게서 떠나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는 것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이 튼튼하며 차라리 육신을 떠나서 주와 함께 살기를 원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난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우리가 육신으로 행한 모든 행위에 대해 그대로 보응을 받아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4.16-5.10 (기독교)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나는 죽기 위해서, 여러분은 살기 위해서. 어느 쪽이 더 좋은 것인지는 신만이 압니다. 플라톤, 스크라테스의 변명 42 (헬레니즘)

나는 아프리카누스에게 당신 조부님, 아버지 파울루스 그리고 다른 모든 고인이라고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분들도 살아계시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대답했습니다. “살아 있지, 물론. 그들은 모두 감옥과 같은 육체의 속박에서 벗어나 즐기고 있단다. 너희가 말하는 지상의 삶이라는 것은 기실 죽음에 불과한 것이야. 보라. 네 아버지 파울루스가 너를 향해 여기로 오고 있지 않느냐!”
키케로, 국가론 6.14 (헬레니즘)

말씀 선집

한국말에서는 재미있는 표현으로 ‘죽는다’는 것을 ‘돌아간다’는 말로 사용합니다. 어디로 돌아간다는 말입니까? 이는 단지 공동묘지로 가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원래 인생이 출발하였던 본래의 처소로 되돌아간다는 뜻입니다. 멀고 먼 역사의 기원을 넘어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국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한국 사람으로 돌아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류조상의 근원이 되는 그 세계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즉, 창조주가 계시다면 그 창조주가 계시는 곳으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거기에서 출발했으니 거기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주도 순환작용을 합니다. 예를 들어 산에 쌓여 있던 눈이 녹게 되면 그 물이 조그만 계곡을 통해서 흐르게 되고 더 나아가서 여러 강들을 통해서 대해로 흘러 들어갑니다. 대해로 흘러 들어가게 된 그 물은 수증기가 되어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순환운동을 통해서 보다 더 높을 수 있는 곳으로, 보다 더 좋을 수 있는 곳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299-61, 1999.02.04)

하나님이 인간의 부모이시라면 우리 인간을 ‘어떻게 지었느냐, 왜 지었느냐?’ 할 때, 하나님의 사랑에 동참시킨 자리에서부터 출발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서 출발하여 하나님의 사랑의 품에서 자라서, 하나님의 사랑의 품에서 성숙해서 가정을 이루어 이 땅 위에서 세계적인 사랑과 연결시킬 수 있는 성숙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사랑의 품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인생길이라 보는 것입니다.
(135-267~268, 1985.12.15)

인간의 본질은 영적인 것입니다. 저 나라에 가면 그러한 인간의 본질이 남을 위하도록 되어 있는 것임을 더욱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2-138, 1957.03.17)

사람은 지상에서 이상적인 가정을 이루어 살면서 그 속사람인 영인체를 완성시켜 천상세계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영인체가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영원히 사는 천상천국이 우리의 본향입니다.… 인간은 동물과는 달리 영인체가 있고, 또 반드시 가야 할 천상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343-196,2001.01.29)

이제 하나님과 같은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영원한 참사랑 자리에 동참한 것입니다. 바깥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한국 어디를 가더라도 이 영생 개념은 없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나는 영원한 생명으로 태어났으니 죽어서 영계에 가 보십시오. 일순간에 비약합니다.
제한된 이 지구의 삶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제한된 곳에서는 자유로이 움직일 수 없지만, 저 세계는 차원이 높은 세계이기 때문에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곳입니다. 시간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사랑을 중심삼고 무엇이든 바라기만 하면 언제 어디서나 다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무궁무진합니다.
우리가 영생체로 지음 받았다는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영생의 참사랑을 중심한 대상체인 나는 영원한 생명체라는 결론이 자동적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영계에 가기만 하면 우리는 자유로운 것입니다.
(216-116.1991.0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