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적 자유의 상태
종교 경전
내면에서 행복을 찾고 내면에서 즐거움을 찾으며 오직 내면에서 빛을 구하는 자, 그러한 요가행자는 신과 하나 됨을 얻어 범열반(梵涅槃)에 이른다.
바가바드기타 5.24 (힌두교)
욕망은 사람을 세속에 붙들어 매는 사슬이요 족쇄이니, 이를 끊어 벗어나기란 어렵다. 그러나 욕망을 초월하고 집착을 넘어선 자는 세간에 얽매이거나 윤회에 떠내려가지 않으며, 걱정하지 않고 무엇을 구하여 애태우는 일도 없다.
숫타 니파타 948 (불교)
드높은 곳에 있으며, 또한 지극히 낮은 곳에 있는 그가 보일 때, 가슴에 채워진 족쇄는 풀어지고 모든 의혹이 사라지며, 모든 행위는 업을 짓기를 멈춘다.
문다카 우파니샤드 2.2.8 (힌두교)
그러하오, 자유함을 얻은 저 바라문, 그의 삶이 즐거워라. 오욕락이 그를 더럽히지 않으니 속박을 벗어나 타는 번뇌를 잠재우며, 가슴 속의 고뇌를 통어하여 일체의 장애를 파하였어라. 마음의 고요함을 얻은 자의 삶은 행복하여라.
앙굿타라 니카야 1.137 (불교)
그대 자신을 열라. 자유로운 공간을 이루라. 그의 굴레로부터 갇힌 자신을 해방시키라. 자궁에서 자유롭게 된 갓 태어난 아기처럼 모든 길에서 움직임에 자유로워라.
아타르바 베다 6.121.4 (힌두교)
주는 곧 영이십니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3.17 (기독교)
일체의 업의 물듦에서 벗어난 영혼은 곧장 위로 떠올라 우주의 구극에 이른다. 업의 사슬이 일순에 툭 끊어지고 모든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위로 상승하는 본래의 성질에 자기를 맡겨 높이 떠오른다. 해탈된 영혼은 온갖 존재의 양태를 덮어씌우며 사방팔방으로 내몰던 카르마의 엄습을 모두 여의었으므로, 위로 상승하는 자기의 본질을 발현하여 마침내 우주의 구극에 이른다.
라트나카란다스라바카차라 10 (자이나교)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불며,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성령으로 난 사람들은 다 이와 같다.
요한복음 3.8 (기독교)
일체의 망상과 번뇌를 끊어 버리고 의식에 탐착하지 않는 그런 자의 열반은, 마치 허공을 나는 새의 발자취처럼 텅 비어 아무 흔적도 없는 까닭에, 더듬어 알아보기가 어렵다.
법구경 93 (불교)
가슴에 주의 명하심을 품은 자는 진실로 살아 있는 지반-무크타(살아있는 해탈자)라 하리. 그에게 즐거움과 슬픔이 다르지 않고, 황금과 한줌의 흙이 다르지 않으며, 감로와 독약이 또한 그러하리.
명예와 불명예가 다르지 않고, 비천한 자도 존귀한 자도 또한 없도다. 나나트가 말하노니, 그와 같이 행하는 자는 진실로 지반-무크타라 하리.
아디 그란트, 가우리 수크마니 9, M.5, p275 (시크교)
말씀 선집
종교에서는 오늘날 인간 세상은 하나님이 해방한 해방군 내에 선 것이 아니라 도리어 반대의 사탄 마귀에 의해서 타락된 세계, 즉 구속된 세계에 처해 있다고 봅니다. 통일교회도 그렇고, 기성교회 역시 그렇게 봅니다.
우리 인간은 그 무엇엔가 모르게 지금까지 구속되어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자신에게 있어서도 여러분의 마음과 몸은 둘이 싸우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본래 인간이 이 둘이 싸울 수 있는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인간에게는 인격이니, 인간완성이니, 인간해방이라는 명사는 절대 불가능한 것입니다.
(85-227, 1976.03.03)
축복받고 좋은 길을 따라 나가다 보면 참사랑의 맛을 알게 되고 그 기쁨에 깊이 들어가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그 길을 가게 된다면 하나 되게 되므로 하나 된 가운데 느끼는 맛이 뭐냐 하면 하나님에 대한 실존을 느끼는 것입니다.
어떻게 느끼느냐? 지금까지 몸과 마음의 투쟁이 그치고 옛날에 자기 제일주의로 생활하던 것이 완전히 없어지고 하나님이 원하는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상대를 위해서, 전체를 위해서 희생하겠다는 이런 관점에 섬으로 말미암아 거기에서 참사랑이 영원히 계속됨으로써 천상세계의 하나님의 기쁨이 내 생활 가운데 드러나게 되어서 전에 느끼지 못하던 만족, 행복감과 전체 내용이 관계를 맺음으로 말미암아 해방된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329-301~302, 2000.08.11)
몸은 그 끝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끝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의 세계는 어떠한 관이 없습니다. 우주관이니 무엇이니 하는 것이 없습니다. 더 나아가서 마음보다 더 큰 것은 심정의 세계입니다. 심정의 세계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심정의 세계는 제재도 받지 않습니다. 마음의 세계는 제재를 받습니다. 마음은 상대적인 조건 여하에 의하여 제재를 받지만 심정의 세계는 제재할 자가 없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을 무엇이 제재할 수 있습니까. 아무리 태산 같은 장벽이 앞을 막아도 꺾지 못합니다.
하늘의 소망이 무엇이겠습니까? 끝 날에 예수님이 오신다면 ‘천국은 네 마음에 있고 천국은 네 심정에서부터 이루어지나니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마음에 있느니라’는 것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 ‘심정으로부터 이루어지나니라’ 하고 결론 맺어야 됩니다.
(7-246, 1959.09.20)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나니라”(고후3:17)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오늘날 자유의 신이요, 해방의 신이요, 통일의 신이신 우리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여러분 자신의 심정에 어떤 시련도 초월할 수 있는 자유의 심정이 어떻게 해야 스며들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 모든 시련의 장벽을 넘어갈 수 있는 해방의 기점은 어떻게 찾아질 것인가, 우리의 이념의 중심이 바라는 통일된 안식의 시간은 언제쯤 찾아질 것인가 하는 것이 여러분이 생각해야 할 중요한 문제입니다.
아직까지 하나님도 자유스런 입장에 계시지 못하고 해방의 자리에 계시지 못하고 통일된 위치에 계시지 못하기 때문에 오늘날 이 땅에서 자유를 부르짖고 있으되 그 자유는 우리가 누려야 할 참된 자유가 못 되는 것입니다.
해방을 말하고 있으되 그 해방은 완전한 해방이 아닙니다. 통일을 주장하고 있으되 그 통일 역시 온전한 통일이 아닙니다. 인류사회는 씨족으로부터 시작하여 부족, 민족을 거쳐 국가로 통일해 나왔지만, 그런 부분적인 통일은 진정한 통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그러한 연고로 하나님에 의하여 지음 받은 우리들도 우리가 바라는 완전한 자유, 우리가 바라는 완전한 해방, 우리가 바라는 완전한 통일은 하나님이 자유로울 수 있고, 하나님이 해방과 통일의 주인공이 되는 날이 와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유와 해방과 통일이 바로 인간들이 바라는 자유와 해방과 통일의 기준이라는 것을 우리는 논리적인 견지에서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중세의 기독교가 하나님의 이념을 중심삼고 하나님의 심중과 통할 수 있는 자유의 입장에 있었거나, 해방된 입장에 있었거나, 통일된 입장에 있었다면 이 땅에 혁명이나 혁신이란 명사는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기독교가 하나님을 중심하고 완전한 자유와 완전한 해방과 완전한 통일이 이룩된 그 기준을 취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유와 해방과 통일의 움직임이 외적세계로 옮겨졌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문예부흥운동이었다는 것입니다.
(4-316~317, 1958.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