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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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감각적 기쁨을 초월하는 신성한 기쁨

종교 경전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일과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
로마서 14.17 (기독교)

무한자는 모든 즐거움의 원천이며, 덧없이 흘러가는 무상한 것 가운데 찾아지는 즐거움이란 없다. 오직 무한자에게 즐거움이 있나니 그 무한자를 구하여 힘써 정진하라.
찬도그야 우파니샤드 7.23 (힌두교)

하나님이 믿음을 가진 자에게… 영원한 축복이 있는 에덴동산의 아름다운 안식처를 약속하셨도다. 그러나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의 즐거움이니 그것은 더없는 경사이니라.
꾸란 9.72 (이슬람)

이 세상과 천상에서 누리는 애욕의 즐거움도 갈애가 멸진한 즐거움에 비한다면 십육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한다.
우다나 11 (불교)

독거의 맛을 알고 욕망이 잠잠해진 평안을 몸소 체험한 사람은 법열의 맛을 즐기면서 두려움 없이 악에서 떠난다.
법구경 205 (불교)

외계와의 접촉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 안에서 행복을 발견할 때, 그는 신의 요가에 완전히 제어되며 끝없는 행복에 이른다. 감각의 접촉에 기인하는 경험들은 다만 괴로움의 원천일 뿐이다. 그것들은 시작과 끝이 있나니 지혜로운 자는 그것들을 즐거워하지 않는다.
바가바드기타 5.21-22 (힌두교)

자존자 브라흐만은 모든 기쁨의 원천이니,… 만일 자비로운 그가 우주에 편만해 있지 않다면, 살 수 있는 자가 실로 누구며 숨쉴 수 있는 자는 또한 누군가? 기쁨을 주는 이는 오직 그뿐이다.
기쁨의 본 모습은 어떠한가? 생각해 보건대, 고귀하고 학식이 높으며, 건강하고 이 세상의 모든 부를 한 몸에 지닌 젊은이가 있다고 하자. 이것이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최상의 기쁨이라고 보자. 그 기쁨의 백배가 간다르바들이 누리는 한 즐거움보다 낫지 않으며, 베다성전에 정통하여 갈애에 끌려 다니지 않는 사람의 즐거움은 또한 이보다 낫다.
간다르바들이 누리는 모든 즐거움의 백배는 천상의 제석천이 누리는 한 기쁨보다 못하며, 베다성전에 정통하여 갈애에 끌려 다니지 않는 사람의 즐거움은 또한 이보다 낫다.
천상의 제석천이 누리는 기쁨의 백배는 낙원의 조상들이 누리는 한 즐거움보다 못하여 천신들의 즐거움,… 제 의식으로 태어나는 신들의 즐거움,… 주재 신들의 기쁨,… 인드라의 기쁨,… 브리하스파티(神主)의 기쁨,… 프라자파티(創造主)의 기쁨,… 브라흐마(造物主)의 기쁨의 각각 한 즐거움에 불과하다. 그러나 베다성전에 정통하여 갈애에 끌려 다니지 않는 이의 즐거움은 브라흐마가 누리는 즐거움에 못지않다.
이렇게 말해진다. 언설로 형용할 수 없고 생각조차도 닿지 못하는 브라흐만의 환희를 아는 자, 그는 두려움을 모른다. 그는 “내가 왜 정의를 행하지 않았던가? 내가 왜 그릇되게 살았을까? 하는 생각들로 괴로워하는 법이 없다. 브라흐만의 환희를 아는 자는 실로 선악의 이원을 넘어선 경계에 노닐고 있기 때문이다.
타잇티리야 우파니샤드 2.7-9 (힌두교)

* 누구나 육체적인 쾌락을 즐길 수 있다. 노예도 가장 좋은 사람 못지않게 즐길 수 있다. 그러나 노예도 자신의 인간적인 샐활을 하고 있다면 모르지만, 아무도 노예가 행복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러므로 행복은 그러한 소일거리에 있지 않고 덕 있는 활동에 깃들여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10.6 (헬레니즘)

말씀 선집

우리 인간을 가만히 보면 그저 여기저기 다니다가 눈도 마비가 됐고, 귀도 마비가 됐고, 냄새 맡는 코도 마비가 됐고, 맛보는 입도 마비가 됐고, 두 팔도 마비가 됐고, 전부 마비가 됐다는 것입니다. 내 눈이, 내 귀가, 내 모든 감각기가 일체화되어서, 모든 신경 선까지 전체를 종합해서 나를 하나로 이끌 수 있는 그 길이 어디냐? 도취하고 기쁨을 느끼며 살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것이 어느 길이냐? 그것이 내 개인의 인생길로, 내 하나의 길로, 내가 만족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나를 따르는 가정이 만족하고, 내가 속해 있는 종족이 만족하고, 내가 속한 나라가 만족하고, 내가 속한 세계가 만족하고, 내가 속한 하늘땅이 만족하고, 하나님까지도 만족할 수 있는 그런 빛의 길이 어디 있느냐? 이게 문제라는 것입니다.
(95-181, 1977.11.13)

개인 생활을 중심삼는 사람들은 잘 못 느끼지만, 은혜로운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늘 보는 만물이 옛날과 다르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늘 새롭다는 것입니다. 아침에 보아도 새롭고, 저녁에 보아도 새롭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사가 서서히 물결쳐 올 때 신비스러움을 입체적으로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감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인 것입니다.
(95-134~135, 1970.03.21)

하나님이 있다면 그 하나님과 인간은 어디서 연결되느냐? 생명이 교류하는 곳, 사랑이 교류하는 곳, 이상이 교류하는 곳입니다. 그 점이 어떤 점이냐? 부자의 관계가 아닐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아, 내가 하나님하고 동등할 수 있다니, 그런 기쁨이 얼마나 크겠나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거기서 기도가 필요합니까? '하나님, 나 죄인이오' 하는 기도가 필요합니까? 사랑의 주체요, 생명의 주체요, 이상의 주체인데 기도가 필요합니까? 위신과 체면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서슴지 않고 하나님을 붙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안고 비벼 주고 사랑해 주는 것을 체험한다면 뼈와 살이 녹아날 것입니다.
여기에 종교 지도자도 왔으리라고 보는데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한번 받아봤습니까? 그런 자리에서 숨을 쉬면 세계가 들락날락한다는 것입니다. 아편을 먹고 술을 마시고 취하는 것보다 못하겠습니까? 아편만 못하겠습니까? 술만 못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에 들어오게 되면 채워지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수백조나 되는 세포까지도 춤을 추는 것을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눈은 눈대로, 손은 손대로 전부 다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 외의 다른 것은 갖다 주더라도 다 싫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에 인간의 최고의 고귀한 욕망이 그것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철저히 알아야 됩니다.
(69-79~80, 1973.10.20)

오늘 하루가 기쁨으로 소화되는 것은 감사한 일이지만 이 기쁨을 내일의 기쁨으로 가져가지 못한다면 오늘의 기쁨은 나에게 있어 영영 원수가 되는 것을 알아야 되겠사옵고, 슬픔과 어려움과 탄식의 조건밖에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기쁨이 좋은 것만이 아니며 슬픔이 나쁜 것만이 아닌 줄 아옵니다. 문제는 기쁨과 슬픔을 연결하는 데 있어서 자기의 목적 성사를 위해 내적 투쟁이 그 환경에 얼마만큼 맺어 들어가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줄 아옵니다. 이러한 것을 알게 될 때 저희들이 뜻과 더불어 생애노정을 가는 데 있어서 뜻과 얼마나 일치되었느냐, 뜻의 가치에 저희들의 기쁨과 슬픔이 어떻게 연결되어 나가느냐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되옵니다.
(43~10, 1971.0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