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영적 지혜의 습득
종교 경전
신에 대한 신앙은 붙들리는 것이지 가르쳐지는 것이 아니다.
격언 (신도)
어떤 비구가 조주선사에게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선사가 대답했다. “없다.” 무몬은 다음과 같이 주석한다. ‘이 오묘한 깨달음을 얻으려면, 그대는 사유의 길을 완전히 끊어야 한다.’
무문관 1 (불교)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요한복음 4.24 (기독교)
우리는 세상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들을 깨달아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선물들을 말하되 사람의 지혜에서 배운 말로 하지 않고 성령이 가르쳐 주시는 말로 합니다. 곧 신령한 것으로 신령한 것을 설명합니다.
자연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에 속한 일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이런 일들이 어리석은 일이요, 그런 사람은 이런 일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이런 일들이 영적으로만 분별되기 때문입니다.
신령한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서도 판단을 받지 않습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습니까? 누가 그 분을 가르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2.12-16 (기독교)
지식은 다섯 가지, 즉 감관지, 경전을 통한 시식, 투시, 텔레파시, 그리고 전지이다. 이 다섯 가지 지식은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진다. 앞의 두 가지는 간접적인 지식이며, 나머지 세 가지는 직접적인 지식이다. 감관지에서는… 단지 불명료한 것들에 대한 파악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투시, 텔레파시, 전지는 직접적인 지식이며, 그것은 감관이나 경전이라는 매개물 없이 생생한 방식으로 영혼에 의해 지각된다.
탓트바르타수트라 1.19-29 (자이나교)
현명한 자의 마음속에는 영계의 실재에 대해 열린 창이 있으며, 그리하여 그는 풍문이나 전통적 믿음에 의해서가 아니라 실제 경험에 의해 무엇이 몸을 아프게 하거나 건강하게 하는지 아는 의사처럼 분명하고 명확하게 무엇이 영혼의 가여움이나 행복을 낳는지를 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예배가 건강에 좋으며 무지와 죄악이 영혼에 치명적인 독이 되리란 사실을 안다. 맹목적으로 다른 이들의 의견을 따르는 이른바 ‘학식 있는’ 사람들도 다음 생애에서의 영혼의 행복이나 비참함에 대한 자신의 믿음에 진정한 확신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편견 없이 그 문제를 대하는 자는 이에 대해 분명한 확신에 도달하게 되리라.
알 가잘리, 행복의 비법
순수한 앎은 많이 듣는 것과 관계가 없다.
왕양명(王陽明)
말씀 선집
원래 참사랑은 경험을 통해서 얻고, 체휼을 통해서 알게 되어 있습니다. 참사랑은 말이나 글, 혹은 일반 교육을 통해서 터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기로 지음 받은 아담 해와는 성장하면서 단계적 생활을 통해서 경험으로써 참된 자녀의 심정, 참된 형제의 심정, 참된 부모의 심정을 체휼하여 완성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참사랑을 전체적으로 체득할 때, 비로소 창조목적을 완성한 이상적인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228-209, 1997.03.13)
대개 우리 사람을 보게 되면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지성적인 사람으로 진리로써 어떤 것을 탐구해서 이치에 맞으면 인정하고 이치에 맞지 않으면 부정하는 타입의 사람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그런 이치보다는 감으로 파악하는 사람입니다. 그걸 우리 통일교회 술어로 말하면 영적이다, 지적이다 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면의 사람, 지적인 면의 사람, 영적인 사람은 내적인 면에서부터 느껴서 외적으로 적용하려고 하는 사람이요, 지적인 사람은 외적인 면에서부터 느껴서 내적으로 적용하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는 나가는 종류요, 하나는 들어오는 종류입니다. 이 두 종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에 있기 때문에 지성적인 사람은 대개 기도를 싫어합니다. ‘아 기도, 기도가 무슨 필요 있느냐?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라는 말을 어떻게 하노?’ 실감이 안 난다는 것입니다. 그걸 딱 생각하면 미신 같고, 믿을 수 없고 자기 자체가 부정되는 것 같고, 이런 느낌이 든다는 겁니다. 이건 지성적인 사람입니다.
이론을 따져서 무엇을 찾겠다고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있는 동시에 나면서부터 ‘하나님!’ 하는 말이 아주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설명하기 전에 좋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게 되면 밥을 안 먹더라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 감도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대개 영적인 운동에 있어서 혁명적인 운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지성적인 사람은 못 합니다. 선생님은 그렇게 봅니다. 대개 신앙세계에서 위대한 일을 하는 사람은 지적인 사람이 아니라 무식하고 미욱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영적인 사람입니다.
세상이야 어떻든 느끼는 대로 해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했으니 해보는 것입니다. 하다 보니 그것이 실천하는 환경에 백중하는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럼으로 말미암아 위대한 인물로 등장할 수 있는 일도 벌어지는 것입니다. 바울 같은 사람도 지성적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메섹에서 하늘의 영적 벼락을 한번 맞고 나서 돌아버렸습니다. 그러니 외적으로 탐구하는 것보다는 내적으로 이렇게 폭발적인 느낌의 길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전부를 부정하고 그것을 존중시한 것입니다. 거기서 새로운 기독교의 혁명의 기수가 된 것입니다.
우리 사람은 이 두 종류가 있는데, 나는 어떠한 타입의 사람이냐 하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대개 영적으로 느끼는 사람은 영적으로는 크지만 진리 면에서는 뾰쪽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릅니다.
처음에는 굵지만 끝이 뾰쪽해지면 이것은 시종여일이 아니기 때문에 영원히 못 가는 것입니다. 어느 때에는 반드시 굴러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또 진리는 크지만 영적인 면이 이렇게 작다면 이것이 영원히 못 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조정하는 생활을 우리는 해야 됩니다.
기도와 진리, 영적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라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평행을 만들어서 화(和)하는 자리에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영계와 육계를 조정해야 됩니다. 영적 세계의 중앙에 서야 될 것이요, 진리 세계의 중앙에 서 가지고 중심적 자리에서 좌우로 조정할 수 있는 인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인간이 되지 않고는 완전한 자리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76-136~137, 1975.02.02)
타락인간은 종교에 의하여 신령과 진리로써(요 4:23) 그의 심령과 지능을 깨우쳐서 그의 내적인 무지를 타개하여 나간다. 신령은 무형세계에 관한 사실들이 영적 오관에 의하여 영인체에 영적으로 인식되었다가 이것이 다시 육적 오관에 공명되어 생리적으로 인식되는 것이며, 진리는 유형세계로부터 직접 인간의 생리적인 감각기관에 의하여 인식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식도 영육 양면의 과정을 거쳐서 오게 된다. 인간은 영인체와 육신이 합해야만 완전한 인간이 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영적 과정에 의한 신령과 육적 과정에 의한 진리가 완전히 조화되어 심령과 지능이 아울러 깨우쳐짐으로써 이 두 과정을 통해 온 양면의 인식이 완전히 일치될 때 비로소 인간은 하나님과 피조세계에 관하여 완전한 인식을 갖게 되는 것이다.
(원리강론, 인류역사종말론 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