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구원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이성적 지식
종교 경전
우상에게 바친 고기에 관해 말하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모두가 지식이 있는 줄로 압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도 그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를 알아주십니다.
고린도전서 8.1-3 (기독교)
방금 돌아가신 우리 어머님은 진실로 나를 꾸짖으셨다. 어머님은 말씀하셨다. “네가 하려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은 책을 보는 것이므로 광야의 어디로 떠나라. 책은 네가 갈 길을 방해하므로 너의 앞날은 처량하기 때문이다. 네가 백인처럼 사는 것을 보니 아무런 환상도 네게 나타나지 않을 것 같구나.”
델라웨어족의 증언 (미주 원주민 종교)
책을 쓰려면 한이 없는 것이니 너무 책에 빠지면 몸에 해롭다.
전도서 12.12 (기독교)
지식으로 쌓은 수천수만의 공적도 저승길을 동반하지 않으리라.
아디 그란트, 자푸지 1, M.1, p.1 (시크교)
참된 목적으로 자아를 추구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참된 지식이다. 그 외의 것을 추구하는 것은 무지이다.
바가바드기타 13.11 (힌두교)
신의가 있는 말은 아름답지 못하고, 아름다운 말은 신의가 없다. 선량한 사람은 말을 잘하지 못하고, 말을 잘하는 사람은 선량하지 못하다. 진실로 앎이 있는 사람은 박식하지 못하고, 박식한 사람은 알지 못한다.
도덕경 81 (도교)
이 세상에 보이는 모든 것 중에서 오직 마음만이 주인이로다. 이런저런 해석을 따라 형상들을 파악함으로써 그것은 미혹되며 실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않네. 이 세상의 모든 철학들은 정신적 날조에 지나지 않네. 우리가 사물의 본질을 꿰뚫고 들어갈 수 있는 단 하나의 교의도 결코 존재하지 않았네.
대방광불화엄 10 (불교)
지혜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학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의 변론가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게 하신 것이 아닙니까? 이 세상이 그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지혜안에서 된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어리석은 선포로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유대 사람은 표적을 구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그리스도를 전하되 십자가에 달리신 분으로 전합니다. 이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음이지만,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20-25 (기독교)
랍비 엘리자르 히스마가 말했다. “새를 제물로 바치고 여성을 정화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다. 천문학과 기하학은 부차적 지식일 뿐이다.”
미슈나, 아보스 3.23 (유대교)
예언자와 성현들의 가르침의 핵심은 인간의 이성에는 한계가 있고 거기서 멈춰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마이모니데스, 당황한 자들의 지침서 1.32 (유대교)
인간의 철학은 신을 인간처럼 만들어 왔다. 크리스천 사이언스는 인간을 신처럼 만든다. 전자는 실수이고 후자는 진리이다. 형이상학은 물리학을 넘어선다. 그리고 물질은 형이상학적 전제나 결론에 들어오지 않는다. 형이상학의 범주는 오직 하나의 기반인 신성한 정신에 놓여 있다.
과학과 건강, 269 (크리스천 사이언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이성을 초월하는 어떤 진리가 거룩한 계시로 밝혀져야 한다. 비록 인간의 이성으로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밝혀냈다고 할 수도 있으나, 그럼에도 인간은 그 거룩한 계시의 가르침이 필요했다.
인간이 밝혀낸 하나님에 대한 진리는 여전히 소수에게만 알려졌고, 그것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는 잘못된 것들과 뒤섞였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 인류를 향한 구원(하나님의 구원)은 오직 이 진리를 아느냐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보다 확실하게 모두를 향한 구원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거룩한 계시를 통해 이 진리를 가르쳐야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성에 근거해 설립된 사변적 과학 외에도 세상에는 늘 계시를 통해 배울 수 있는 신성한 과학이 존재해야 한다.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1.1.1
내 비록 지식의 저 높은 경지에 도달할지라도 가르침의 한 단어도 내 안에 있지 않음을 나는 안다. 또한 하늘 향한 섬김에 아직 한 발자국도 내밀지 않은 것임을 알고 있다.
바알 셈 토브
아테네가 예루살렘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테르툴리아누스
말씀 선집
인간의 머리를 중심삼고 이상세계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이루어지는 것이다.
(뜻길, p.173)
종교의 기원은 철학의 기원과 다릅니다. 철학은 하나님을 찾아 나가는 길이지만, 종교는 하나님을 만나 가지고 생활하기 시작하는 길입니다.
(189-70, 1989.03.19)
도서관마다 즐비하게 꽂혀 있는 경서나 철학 서적들을 섭렵한다고 해서 몸과 마음의 통일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447-163, 2004.05.01)
하나님이 알기 위해서 지은 게 아닙니다. 창조이상이 지식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그걸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창조이상의 뜻, 우리 이상의 목적은 지식이라든가 권력이라든가 돈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그건 사랑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114-130, 1986.04.12)
학생 여러분들, 이제 알았으니 이제부터 서울대학에 다닌다고 자랑하지 말라는 겁니다. 난 뭐 훌륭하게 안 봅니다. 일 년 동안 공부해야 몇 시간이나 됩니까? 하루에 일곱 시간 공부한다 생각해도 한 주일에 닷새 잡으면 오칠은 삼십오(5x7=35) 서른 다섯 시간, 100날 잡으면 7백 시간입니다.
그러면 3백 날 잡으면 얼마인가? 한 2천 시간. 이것을 24시간으로 나눠 보면 얼마 됩니까? 그래 봐야 며칠 안 되는 것입니다. 그거 가지고 자랑하고, 주제넘게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좋은 것이 사랑입니다. 그것보다 더 귀한 사랑은 순식간에 배울 수 없습니다. 사랑의 실천력이라는 것은 영원을 기준으로 하여 움직이는 것입니다. 장구한 세월을 요한다는 것입니다. 1년, 2년에 패스할 수 없습니다. 10년, 20년, 30년, 40년 가도 졸업장을 탈 수 없습니다. 차원이 자꾸 높아져서 뒤로 돌아와 닿는다는 것입니다.
무슨 학문을 하게 되면 박사 학위를 딸 수 있지만, 사랑의 철학 과정이라는 것은 무한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싫증나고 지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재미있고 세상의 무엇보다도 행복하고 감사하고 당당하다는 것입니다.
(113-324~325, 1981.05.10)
절대적 가치는 지식이 아니라 사랑, 정서와 결부되어서 생각해야 됩니다. 오직 사랑만이 그 자체가 목적이며, 완성이며, 최고가치인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베푸는 사람이 기쁘고, 그것을 받는 사람이 또한 기쁜 것입니다. 원래 사랑은 본성으로 느낌으로써 개체 안에서 싹이 트고 체휼되는 것이지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의 세계는 인식을 통해서 계발되지만 정(情)의 세계는 계발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가치는 지식의 차원이 아닌 절대사랑의 차원입니다. 이런 점에서 제1원인자는 우리의 인식 영역 내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정서적 차원에서 감응 체휼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입체적 내용이 결핍된 가치는 영원불변하지 못하며 언젠가는 흘러가고 맙니다. 현재까지 여러 갈래의 주의와 사상들은 일면으로는 인류에게 도움을 주기도 했습니다만, 오히려 인류의 사상체계를 오도하고 역사를 발전적으로 이끌지 못한 면도 많다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존 가치체계의 재평가가 불가피하다고 봅니다.
(102-59~60, 1978.1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