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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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눈물의 길

종교 경전

키사 고타미라는 여인에게 외아들이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가 죽었다. 슬픔에 젖은 그녀는 아들을 안고 온 이웃을 다니며 약을 구하러 쫓아 다녔다. 사람들이 말했다. “아이는 이미 죽었는데, 저 여인이 제 정신이 아니구나.”

마침내 키사 고타미 여인이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그가 그녀에게 일러주었다. “나는 당신에게 아이를 낫게 할 약을 줄 수는 없소. 그러나 그것을 할 수 있는 의사를 내가 아오. 샤캬무니 부처를 찾아가시오.”

키사 고타미는 부처에게 매달려 울부짖으며 간청하였다. “주여! 스승이시여! 내 아들을 낫게 할 약을 내려주소서.”

부처께서 대답하셨다. “나에게 한 움큼의 겨자씨를 가져다주시오.” 여인이 기뻐하며 그것을 마련해 오마고 대답하자, 부처께서 말씀하셨다. “그런데 그 겨자씨는 아들이나 남편 또는 부모나 친구 중 아무도 잃은 자가 없는 집에서 가져와야 하오.”

불쌍한 키사 고타미는 겨자씨를 구하러 이집 저집을 돌아다니게 되었다. 그녀를 불쌍히 여긴 사람들이 말했다. “자, 여기 겨자씨가 있소, 가져가시오.” 그러나 그녀가 “당신 집에서는 아들딸이나 부모형제를 잃은 적이 없소?”라고 물었을 때, 그들이 그녀에게 대답하였다. “아! 살아있는 자는 오히려 드물며 죽은 자가 많으오. 부디 뼈에 사무치는 우리의 슬픔을 상기시키지 말고 가시오.” 죽음으로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지 않은 집은 어디에도 없었다.

키사 고타미는 지치고 낙심하여 어두운 길을 가다가 어느 언덕에 주저앉았다. 멀리 내려다보이는 마을에는 가가호호 등불이 켜지다가 점점 꺼져갔다. 마침내 온세상이 어둠에 잠겼다. 그녀는 문득 사람의 운명을 생각하였다. 켜졌다가 다시 꺼지는 등불처럼, 왔다가는 필경 돌아가야 하는 운명임을 깨달았다. “슬픔에 잠긴 나는 얼마나 어리석은가! 죽음에 예외가 없거늘, 이 황량한 골짜기에 온갖 이기심에 찌든 이를 불멸로 인도하는 길이 있거늘.”

아들에 대한 이기적인 사랑을 훌훌 털어버린 키사 고타미는 죽은 아들을 숲속에 묻고 부처께로 다시 돌아갔다. 그에게 귀의하여 마침내 법 안에서 평안을 찾았다.
붓다고사, 겨자씨의 비유 (불교)

말씀 선집

눈물의 역사의 기원을 우리가 다시 한번 생각하면, 그것은 어디서부터 시작했겠습니까? 타락하게 될 때 아담 해와가 먼저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흘렸을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아담 해와가 눈물을 흘린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남을 위해서 눈물을 흘린 게 아니라 자기들의 슬픈 사정을 중심삼고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흘린 눈물은 누구를 위해 흘렸겠습니까? 그것은 틀림없이 천도를 어김으로써 추방당해야 할 그런 운명에 처하게 된, 자식 된 아담 해와를 바라보며 흘린 눈물이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을 위해 흘린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 자식을 위해 흘린 눈물임에 틀림없습니다.

눈물을 흘리는 그 자체는 비참한 것입니다. 인간 세계에서는 눈물의 역사가 먼저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도 눈물의 시작을 먼저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게 될 때 인간도 비참한 것이요, 하나님도 비참한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흘리는 눈물은 인간 자신에게 잘못이 있기 때문에 그건 응당 흘려야 할 눈물일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눈물의 역사는 인류의 시조로부터 시작되어서 눈물의 발판은 세계적으로 확대되어 나왔습니다. 그러한 비참한 자리에서 전쟁의 역사와 고난의 역사가 반복하면서 역사는 발전되어 나왔습니다. 그러면서 어떤 때는 개인 자체가 남에게 피해를 받아서 눈물을 흘리는 역사로부터 가정이 피해 받고, 민족이 피해 받고, 세계가 피해 받아 눈물을 흘리는 역사가 거듭된다는 것입니다. 눈물의 역사를 걷어치울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를 위하여 슬퍼하고, 자기 가정을 위하여, 자기 민족을 위하여, 자기 국가를 위하여, 자기 세계를 위하여 슬퍼하고 난 이후에야 새로운 선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있으면 있지, 이것을 위해 슬퍼하지 않고는 선의 세계로 돌아갈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개인적인 입장에서 타락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세계적으로 타락했습니다. 그러면 세계적인 입장에서 맨 밑창에 떨어진 인간이 이것을 넘어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가야 됩니까? 그러려면 이 세계의 사람들은 자기들을 중심삼고, 자기 일이라든가 자기 가정이라든가 자기 국가라든가 혹은 자기의 주의와 주장을 중심삼고 슬퍼하는데 이 세상을 극복해 나가야 됩니다.
반대로 가야 됩니다. 반대의 길을 가야 되는 것은 틀림없는 결론입니다. 이처럼 인류의 정상을 바라보는 하나님은 반대적인 입장에서 슬퍼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눈물에 젖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반대적인 입장에서 슬퍼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인간이 행복한 곳은 어디입니까? 자신이 눈물을 극복하는 길에서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다음에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나님이 눈물을 흘리는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여 넘어간 자리에 행복이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인류시조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눈물의 역사를 하나님과 인간이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 자리는 눈물이 시작하지 않았던 자리이니 우리는 이 모든 눈물의 세계를 극복해야 합니다. 그것을 초월해서 넘어가지 않고는 행복의 기원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결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에 서 있는 것이 인간들입니다. 그래서 그 입장을 극복해서 우리는 전진해야 하고, 이 슬픈 눈물의 고개, 이 인간의 눈물의 고개뿐만 아니라 하늘이 흘린 눈물의 고개를 넘어가야 할 운명이 오늘날 인간이 가야 할 운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은 두 종류의 눈물의 고개를 다 넘어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비참하고 얼마나 불쌍하냐 하는 이런 고통의 와중에서 스스로 몸부림치며 눈물을 흘려야 됩니다. 그러므로 남이 모르는 가운데 인생문제라든가 자기의 일생의 문제를 중심삼고, 이 사회 문제, 전체의 문제를 걸고 고민하고 눈물을 흘리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또 인간 자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있고, 인간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놓고 스스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젊은 시대에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고민도 하지 않은 사람의 인생은 인생의 축에 들어가지도 못합니다.

그러면서 자기의 눈물을 극복함과 동시에 이 세계의 고통스럽고 비참한 것을 극복시킬 수 있는 길이 없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아무리 자기 스스로 인생문제를 고민하고 이 세계문제를 고민해서 눈물을 흘린다 하더라도 그것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근원을 뒤집어 놓아야 됩니다. 그것은 자기가 슬픈 눈물을 흘린 고비뿐만 아니라, 세계가 눈물 흘렸던 고비뿐만 아니라, 하늘이 눈물을 흘렸던 고비를 돌려놓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돌려놓느냐 하는 것을 생각하기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되 자기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고, 자기 나라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고, 자기 편, 자기를 중심삼고 눈물을 흘리는 역사를 가지고는 새로운 이상세계로 전진하는 데 아무런 보탬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타락한 아담 해와 편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면 여기서 하늘이 슬퍼했던 또 다른 하나의 영역을 우리는 발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늘이 눈물을 흘렸다면 인간이 하늘이 흘린 눈물의 경지를 넘어가지 않고는 인류의 행복의 기지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를 넘어서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길을 발견해야 됩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하나님이라는 주체를 발견하고 그가 눈물을 흘렸던 그 경지 이상의 곳을 내가 탐지하여 그런 곳을 가겠다고 하는 욕망을 지녀야 됩니다.
(94-306~310, 1977.1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