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영혼의 통로에 불과한 경전의 문자에 집착하지 말자
종교 경전
주 마하비라께서 가우타마에게 말했다. “다르마가 현자들에 의해 직접 현시되지 않을 때, 그것은 말이라는 쇠 그물을 통해 나타난다. 추측은 그 창문을 덮는 쇠 그물이다. 다양한 종파와 학파는 그와 같은 간접적인 통찰에서 나온다. 가우타마여, 그대에게 제시된 길은 현자의 직접적인 길이다. 부지런히 정진하여 다르마를 보는 현자가 되어라.”
웃타라디야야나 수트라 10.31 (자이나교)
문자는 사람을 죽이지만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
고린도후서 3.6 (기독교)
마하마티여, 훌륭한 가문의 아들이나 딸이 언어에 집착하지 않도록 잘 유념하게 하여라. 언어란 그 의미와 완전히 일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진리는 문자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손가락 끝을 쳐다보는 사람이 되지 않게 하여라. 어떤 사람이 손가락 끝으로 어떤 것을 가리킬 때, 그 손가락 끝이 곧 가리켜지는 대상이라는 착각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단순하고 무지한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도 말이라는 그 손가락 끝에 바로 그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하며, 손가락 끝에 불과한 말에 집착하는 성향 때문에 궁극적 실재를 파악하지 못할 것이다. … 자기 손가락 끝을 보면서 거기에 의미가 있다고 여기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한다. 그대는 스스로 열심히 정진하여 의미 자체를 파악하도록 하여라.
능가경 76 (불교)
통발은 물고기를 잡기 위해 있으며 물고기를 잡고 나면 통발을 잊게 된다. 올가미는 토끼를 잡기 위해 있으며 토끼를 잡고 나면 올가미를 잊게 된다. 말은 생각을 전하기 위해 있으며 뜻을 알고 나면 말을 잊게 된다. 나도 어찌하면 말을 잊은 사람을 만나 더불어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될까?
장자 26 (도교)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여행 중이었다. 그는 큰 물결이 넘실대는 강을 만났다. 이쪽 언덕은 위험하지만, 건너편 언덕은 안전하고 위험이 없다. 건너편 언덕으로 가는 나룻배도 없었고 다리도 없었다. 그는 생각했다. ‘이 강은 폭이 넓고 수량이 엄청나게 많은데, 이쪽 언덕은 위험으로 가득하지만, 저쪽 언덕은 안전하고 전혀 위험이 없다. 건너편으로 가는 배도 없고 또한 다리도 없다.
만일 내가 풀과 나무와 가지와 잎을 모아 뗏목을 엮어서 그 뗏목에 의지하여 두 손과 두 발로 열심히 노력하여 저 언덕으로 건너가면 좋지 않을까?’ 그래서 그는 풀과 나무와 가지와 잎을 모아 뗏목을 엮어서 그 뗏목에 의지하여 두 손과 두 발로 열심히 저어 안전하게 건너편 언덕으로 건너갔다.
건너편 언덕에 도착했을 때 그는 생각했다. ‘이 뗏목은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이 뗏목의 도움으로 나는 두 손과 두 발로 열심히 노력하여 안전하게 이쪽으로 건너올 수 있었다. 어디를 가든 내가 이 뗏목을 머리에 이거나 어깨에 메고 간다면 좋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렇게 하는 것이 그가 그 뗏목을 제대로 처리하는 것인가?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그가 뗏목을 제대로 처리하는 것인가? 건너편으로 건너가 언덕에 닿았을 때, 만일 그가 ‘이 뗏목은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이 뗏목의 도움으로 나는 두 손과 두 발로 열심히 노력하여 안전하게 이쪽으로 건너올 수 있었다. 이제 나는 이 뗏목을 뭍에 끌어올려 놓거나 정박시켜놓고 어디든 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그 뗏목을 제대로 처리한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와 마찬가지로 나는 뗏목과 유사한 가르침을 설했다. 나의 가르침은 건너기 위한 것이며, 결코 짊어지고 가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대들은 그 가르침이 뗏목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아야 하며, 설사 선법에 대해서조차도 집착을 버려야 한다. 선법에 대해서도 이와 같거늘, 하물며 악한 일들에 대해서야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맛지마 니카야 1.134-35 (불교)
말씀 선집
타락된 인간은 신령에 대한 감성이 극히 둔하기 때문에, 대개 진리 면에 치중하여 복귀섭리 노정을 따라 나가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인간들은 흔히 낡은 시대의 진리 관에 집착되어 있기 때문에, 복귀섭리가 새로운 섭리의 시대에로 전환하고 있어도 그들은 이 새 시대의 섭리에 쉽게 감응하여 따라갈 수는 없는 것이다.
구약성서에 집착되었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따라 신약시대의 섭리에 호응할 수 없었던 역사적인 사실은 이것을 입증하는 좋은 예라 하겠다. 그러나 기도로써 신령한 것을 감득할 수 있는 성도들은 새 시대의 섭리를 심령 적으로 알게 되므로, 낡은 시대의 진리 면에서는 상충적인 입장에 서면서도 신령을 따라 새 시대의 섭리에 호응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 중에는 구약성서에 집착된 인물은 하나도 없었고 오직 마음에 느껴지는 심령을 따라간 사람들뿐이었다.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이나 양심적인 사람들이 말세에 있어서 극심한 심령적인 초조감을 면할 수 없게 되는 이유는, 그들이 막연하나마 신령을 감득하여서 마음으로는 새 시대의 섭리를 따르려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몸을 이 방향으로 이끌어 줄 수 있는 새 진리에 접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심령적으로 이러한 상태에 처한 신도들이 그들을 새 시대의 섭리에로 이끌어주는 새 진리를 듣기만 하면, 신령과 진리가 동시에 그들의 심령과 지능을 깨우쳐서 새 시대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적인 요구를 완전히 인식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은 형언할 수 없는 기쁨으로 그에 호응하게 되는 것이다.
(원리강론, 인류역사종말론 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