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경전은 하늘 진리의 한정된 부분을 교시
종교 경전
만일 땅에 있는 모든 나무들이 펜이고 바다와 일곱 대양을 더하여 그것을 돕는다 하더라도 (잉크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다 할 수 없으리라. 실로 하나님께서는 강하시고 현명하시니라.
꾸란 31.27 (이슬람)
통찰력 있는 바라문에게 모든 경전들이란 사방에 홍수가 났을 때 물탱크 정도에 불과하다.
바가바드기타 2.45-46 (힌두교)
항아리에 담긴 바닷물은 바다라고 부를 수도 없고 바다가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그것은 다만 바다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절대 진리에서 나온 하나의 교의는 진리라고 부를 수도 없고 진리가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비디야난디, 탓트바르타슬로카바르티카 116 (자이나교)
말은 네 방면에서 가늠된다. 지혜로운 자는 이 네 구분을 아는 통찰을 지닌다. 비밀 속에 감추어진 세 방면은 아무런 움직임도 야기하지 않는다. 네 번째 방면은 사람에 의해 말해지는 것이다.
리그 베다 1.164.45 (힌두교)
우리가 가진 토라는 하늘 지혜의 불완전한 형태이다.
창세기 랍바 17.5 (유대교)
아직도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지금은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분 곧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듣는 것만 일러주실 것이요,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다.
요한복음 16.12-13 (기독교)
모든 시대에 성서가 있었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대로 삭제하시며 원하시는 대로 확정지으시니 성서의 근원이 그분에게 있노라. 우리(하나님)가 그들에게 약속한 것의 일부를 너에게 보여준다거나 또는 우리(하나님)가 너를 불러들인다고 해도 너는 오직 메시지를 전달할 뿐이며 계산은 우리가 할 것이니라.
꾸란 13.38-40 (이슬람)
홀로 명상 중에 있던 존자 말룽키야풋타에게 다음과 같은 생각이 일어났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은 견해들에 대해 대답하지 않고 제쳐두고 배척하셨다. 즉 세계는 영원하다든가 세계는 영원하지 않다든가, 세계는 무한하다든가 세계는 무한하지 않다든가, 영혼은 육체와 같다든가, 육체는 육체고 영혼은 영혼이라든가, 성자는 사후에 존재한다든가 성자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다든가, 세존께서는 이에 대해 내게 말씀하지 않았다. 세존께서 이에 대해 나에게 소상하게 일러주지 않는다는 사실이 못마땅하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말룽키야풋타야, 만일 어떤 사람이 독이 진하게 묻은 화살을 맞았다고 하자. 그의 친구들이나 동료들이나 친척들이 와서 그를 의사에게 데려갔다. 그런데 그가 ‘나는 나를 쏜 사람이 전사계급인지 바라문계급인지 평민인지 아니면 천민인지 알아야 화살을 뽑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하자. 또는 그가 ‘나는 나를 쏜 사람의 이름과 성이 무엇인지 알기 전에는 화살을 뽑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하자. 또는 그가 ‘나는 나를 쏜 사람이 키가 큰지 작은지 중간인지 알기 전까지는 화살을 뽑지 않겠다.’고 말했다고 하자.
또는 그가 ‘나는 나를 쏜 사람의 피부색이 검은지 거무튀튀한지 노란지 알기 전에는 화살을 뽑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하자. 또는 그가 ‘나는 나를 쏜 사람이 어떤 마을이나 읍내 또는 도시에서 왔는지 알기 전에는 화살을 뽑지 않을 것이다.’ … 라고 말했다고 하자. 말룽키야풋타야, 그러면 이 사람은 그러한 사실을 알기도 전에 죽을 것이다.
이와 같이 말룽키야풋타야, 만일 어떤 사람이 ‘나는 세존께서 세상이 영원하다든지 세상이 영원하지 않다든지 하는 등에 대해 나에게 설명해 주기 전에는 세존 밑에서 종교적인 삶을 추구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여래로부터 그 설명을 얻기 전에 죽을 것이다.
종교적인 삶은 세계가 영원하다든가 세계가 영원하다는 교의에 의지하지 않는다. 세계가 영원하지 않다는 교의에 달려 있는 것도 아니다. 세계가 영원하다든지 세계가 영원하지 않다는 교의를 가지든 아니든 태어남, 늙음, 죽음, 우울, 슬픔, 고통, 근심, 불안이 있다. 나는 이러한 것들은 지금 여기서 파괴할 것을 가르친다.
그와 같은 견해들에 대해 답하는 것은 유익하지 않고, 종교의 본질과도 무관하며, 욕정에 대한 혐오나 억제, 지멸, 적정, 초세간적 능력, 궁극적 지혜, 그리고 열반을 얻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그것에 대해 설명하지 않은 것이다.”
맛지마 니카야 1. 426-431 (불교)
말씀 선집
신령과 진리는 유일하고 영원불변하지만, 무지한 상태로부터 점차적으로 복귀되어 나아가는 인간에게 그것을 가르치시기 위한 범위나 그것을 표현하는 정도나 방법은 시대를 따라 달리하시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예를 들어 인간이 아직도 몽매하여 진리를 직접 받을 수 없었던 구약 전 시대에는 진리 대신으로 제물을 드리게 하셨고, 인간의 심령과 지능의 정도가 높아짐에 따라 모세 때는 율법을, 예수님 때는 복음을 주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의 말씀을 진리라고 하지 않고, 그 자신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다(요 14:6). 왜냐하면 그의 말씀은 어디까지나 진리 되신 자신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법이어서 그 말씀을 받는 대상에 따라서 그 범위와 정도와 방법을 달리하시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서의 문자는 진리를 표현하는 하나의 방법이요, 진리 자체는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이러한 견지에서 입각해 볼 때, 신약성서는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있어 심령과 지능의 정도가 대단히 저급하였을 때의 인간들로 하여금 진리를 알게 하기 위해 주셨던 하나의 과정적인 교과서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당시에 사람들을 깨우치기에 알맞도록 주셨던, 한정된 범위 내에서의 비유 또는 상징적인 표현 방법 그대로를 가지고 현대과학 문명인들의 진리 욕구를 완전히 충족시킨다는 것은 결정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오늘날의 지성인들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는 보다 고차적인 내용과 과학적인 표현 방법에 의한 것이 나오지 않으면 안 된다.
(원리강론, 인류역사종말론 5.1)